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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슈퍼스타 소개 Team Justice Story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노동자로, 택시 노조 간부에서 구의원 후보로! 이제 가난하고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한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

유종천

 “예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도덕적인 인간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신앙적 은총을 내린다고 했다. 또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이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가난하고 고난 받는 이들의 곁에 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싶었다.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신학을 공부해 아름다운 영성을 키워가고자 했다. 그래서 유종천 씨는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비를 벌기위해 막노동에 공장 일에 택시운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독재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대학 선배 故 문용동 전도사를 알게되었고 추모사업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도 인간이다" "근로기본법을 준수하라"며 분신으로 항거했던 청년 전태일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택시회사였다. 당장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갈 곳이 딱히 없었다. 그렇게 8여년간을 택시를 운전했다. 사납금을 내고 나면 빠듯한 월급이지만, 그마저도 감사하며 소시민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일을 해도 기사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늘 그대로였다. 인터넷을 뒤지고 다른 택시회사의 노동조합을 찾아갔다. 회사와 결탁한 어용노조의 횡포에 뭣도 모르는 기사들이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를 함께 만들었다. 집회도 참여하고 천막치고 80일을 싸웠다. 그렇게 싸우다가 광주노동자교육센터를 만났고 그곳에서 민주노동당을 알게 됐고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라기에 바로 입당했다. 택시지부 광주지회 조직국장으로 일을 하다 2016년 총선후보로 나선 장화동 위원장의 선거캠프에 합류했고 그 후 정의당 광주시당 노동국장을 거쳐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그에게 정의당은 낯설다. 선거도 그렇고 정책도 그렇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다. 그래도 그를 신나게 만드는 일이 있다. ‘비상구’활동이다. 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노라면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힘없고 서러운 이들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도시노동자로 살아온 그이기에 억울한 노동자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정의당이 좀 더 노동자에게 사랑받는 정당이 되길 바란다. 그런 마음을 알아봤는지 장화동 시당위원장이 이번 지방선거에 ‘노동정치’를 위해 출마하라고 한다. 그것도 서구에서. 몇 날을 고민하다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두려움도 있지만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결심’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청소년 노동인권 강사로 3년을 출강해왔다. 학생들은 노동권에 ‘무지’했고 노동자에 대해 ‘오해’ 하고 있었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노동자란 직업에 대한 존중감이 별로 없었다. “아래로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구의원이 되면 학생들이 1년에 한 번은 ‘노동인권교육’을 받도록 할 생각이다. 노동자란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일깨워 주고 싶고 노동자의 권리가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다. 노동인권교육과 함께 노동자의 문화와 복지, 건강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책임지는 정책을 펼쳐내고 싶다. 노동자가 행복해야 지역이 건강하고 노동이 당당해야 대한민국이 행복한 것 아니겠나 싶은 생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 피해를 입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창립부터 함께해 온 그는 2010년 6월 ‘일본 항의방문단’ 활동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일본정부는 당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명목으로 99엔, 한국 돈으로 1,300원을 지급해 물의를 일으켰다. 정부는 이렇다 할 대응조차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결국 항의방문단 일원으로 참가했다. 도쿄 시내에서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삼보일배 시위행렬에 동참한 것.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팔순이 넘어 이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들과 행진하면서, ‘국가란 무엇일까?’ 또 ‘정치는 서러운 국민들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정치란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비상구를 통해 만난 노동자들의 사연을 듣고 나면 제일처럼 나서서 회사 관리자들과 입씨름을 하고 간혹 가다가는 험악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비록 그에게 세상을 뒤흔들 큰 힘은 없지만, 세상에 지친이들 품어 줄 넉넉한 가슴이 있다. 그래서 무엇에도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가난하고 고난 받는 이들의 편에 서겠다는 그의 결심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기대한다. 부디 승리하길.

★ 유종천의 초간단이력

현) 정의당 광주시당 사무처장
현) 정의당 서구위원회 중앙공원지킴이 단장
현) 금호동 마을도서관 ‘다락’ 운영위원
현) 풍암동 ‘아이숲’ 어린이도서관 운영위원
현) 청소년노동인권 강사
전) 광주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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